백두대간사람들 13 구룡령/ 도의선사 사자후를 듣고 싶다
작성일 18-08-28 12:21
페이지 정보
작성자안강 조회 235,774회 댓글 0건본문
구름이 안개처럼 깔리고 있었다. 차디찬 바람에도 고갯마루에 선 것은 아홉마리 용을 만나고 싶어서였다. 긴 굽이로 비탈을 타는 구룡령 포장도로는 아무래도 용의 몸짓이 아니다. 용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멀리 북쪽으로 안산에서 대청봉으로 달리는 설악산 서북주능이 하늘금을 긋는다.
지나온 백두대간 능선은 묵은 눈을 털어내며 봄 채비로 분주하다. 빈틈없이 어깨를 맞댄 저 봉우리 아래 그동안 만났던 백두대간 사람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까? 남동쪽으로 이어진 만나야 할 산들은 구름에 몸을 감춘 채 대면식이나 치르자며 잠깐씩 얼굴을 내비친다. 저 구름나라 속에 오대산에서 불거져 나와 계방산을 낳고 태기산을 키우고 용문산을 어르며 달리다 한강의 물줄기를 막아선 팔당댐 두물머리에서 기운을 다하는 또 하나의 산줄기가 있을 것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가르는 그 산줄기는 바다를 만나지 못하는 탓에 이름을 얻지 못했다.
용을 만나겠다는 생각은 구룡령 아래 첫마을 갈천에서 접어야 했다. “원래 고갯길은 지금 찻길이 아니래요. 마루에서 서쪽으로 산 하나는 넘어야 옛길이 있어요. 짚신 신고 다닐 때나 넘어 다녔지 지금은 길이 없을 거야.” 이두식(71) 할아버지는 고개의 내력을 일러주면서도 비탈밭 땅심을 돋울 퇴비를 지게에 퍼담기를 멈추지 않는다. ‘구렁이가 길을 알려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옛길이 사라진 것은 일제시대였다. 한계령이나 미시령보다도 먼저 놓인 구룡령 신작로는 땅 속은 헤집고 땅 위에서는 울창한 숲을 잡아먹었다. 두 세 아름씩이나 됐다는 빽빽한 소나무숲이 박살나고 산 여기저기 철광석을 캐는 굴이 뚫리기 시작한 것은 신작로가 난 다음이었다. 갈천4보 가운데 하나였던 지금의 구룡령 중간쯤에 있었다는 오관석이를 건드린 것도 신작로였다. “능선이 내려앉으면서 바위가 쑥 솟았는데 그 가운데로 길을 냈어요. 지금도 갈천 윗동네를 마치래라고 불러요. 땅이 말을 닮아서인데 그 바위가 말의 코였던 모양이라. 길을 낸 것이 마치 코뚜레를 뚫은 형국이었던 모양이지. 말에다 코뚜레를 뚫었으니 그 말이 어떻겠소. 날뛰지? 그래서 마을이 쇠퇴했대요.” 입심 좋은 미천골휴양림 관리인 이현재(61)씨의 설명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오관석이마저 95년 2차선으로 길을 넓히면서 아예 없애버린 탓이다. 이씨의 말이 맞는지 길이 나기 전 20여호에 이르던 마치래의 가구는 이제 4집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갈천(葛川)이라는 이름에는 지독한 가난이 함께 한다. “칡떡 먹어봤수? 칡을 물에 담가 두드리면 물이 하얘지는데 이 물을 가라앉히면 가루가 나오지. 그 가루로 떡을 해먹으며 보릿고개를 넘었다니까.” 봄이면 마을을 지나는 내가 칡물로 뽀얗다고 해서 ‘갈천’이 됐다는 것이다. “본래 이름은 치래지. 일본인들이 들어와 토지정리하면서 한자를 써서 갈천이라고 불리게 된 거요.” 몇 안 되는 갈천 토박이 엄익환(63)씨는 치래라는 이름의 내력을 풍수설로 설명한다. 피난처라고 들어왔는데 마을 형국이 강에 떠 있는 칡잎을 닮아서 사람들이 정주하지 못하고 이사를 간다는 것이 엄씨가 풀어내는 작은 내력이다. 엄씨의 설명에는 ‘치래’가 ‘칡물이 흐르는 내’가 아니라 ‘미래로 닿은 땅’ 치래(致來)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양양은 변방지역이었다. 맥국의 부족국가에서 임둔군을 거쳐 다시 고구려로 신라로 고려로 수없이 뒤바뀌어온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든 곳이 치래라면, 그 아랫마을 황이리 미천골 선림원에서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끝내려는 선종불교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 근래에 세웠을 관세음보살이 보물 제444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을 바라보고 섰는 선림원터부도비는 홍각선사의 것이라 한다. 홍각선사의 법맥은 선종을 이 땅에 들여온 도의선사에 닿아 있는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신라 호족의 아들이었던 도의선사는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해 ‘동쪽의 달마’라는 칭송을 남겨두고 37년간의 타국살이를 끝내고 신라로 돌아온다. 헌덕왕 3년(821)의 일이다. 당시 신라불교의 주류는 교종이었다. 신라왕실의 전폭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으며 경전 해석과 염불에 몰두하던 당시에 ‘염불을 외우고 경전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는 도의선사의 주장은 혁명이었을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도의선사의 사상에는 만인의 평등과 인간성 회복이 담겨 있었다. 이는 곧 신라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도의선사는 결국 다른 승려들의 배척을 받으며 선림원터에서 머지않은 양양군 둔전리에 진전사를 세우고 은둔하게 된다.
선림원터에서 발견된 범종의 명문에는 조성 시기를 애장왕 5년(804)이라고 적고 합천 해인사를 세운 순응화상까지도 범종조성불사에 참여한 것으로 적고 있다고 한다. 명문으로 본다면 선림원은 사세가 대단한 절이었을 것이다. 이런 절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어떤 연유였을까? 1985년 선림원지를 발굴한 동국대 조사단은 선림원이 산사태로 사라진 것으로 추측했다. 선림원지는 아무리 돌아봐도 산사태가 일어날 만한 지형이 아니었다. 산사태 흔적은 더구나 찾아볼 수 없었다. 왕명으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비문을 새길 정도의 사찰이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사라진 데에는 다른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송도 말엽 불가사리가 돌아다닐 때 비구니들이 모여들어 절이 문란해지자 승려들이 절을 묻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도의선사의 법맥을 이은 가지산파의 운명과 연결된다. 가지산파는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 선종구산 가운데 일파였다. 1948년 발견된 범종은 엄청난 숯과 함께 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숯은 부식으로부터 종을 보호하려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범종은 상처 하나 없는 온전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은 없지만 위기에 맞닥뜨린 승려들이 그 위기에서 범종을 구하기 위해 흙 속에 묻었던 것은 아닐까?
“8만 승려들이 중 훈련을 받던 곳”이라는 절의 규모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는다. 선림원터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 골짜기는 지금도 채마전이라 불린다. 승려들이 먹을 채소를 재배한 밭터였다는 것이다. 깊은 산중에 어울리지 않는 미천골 상류 밤나무골의 고목이 된 밤나무들에는 부처님 공양에 쓸 밤을 얻기 위해 절에서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쌀 씻은 물이 양양 남대천까지 물을 흐렸다는 미천골은 옛 이름 사래골도 ‘쌀내’가 변한 것이라 한다. 선림원터에 남아 있는 건물터라곤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의 주춧돌뿐이다. 그 많던 승려들은 어디에 머물렀던 것일까? 미천골 어딘가에 또다른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했다는 홍각선사부도비 탑신은 이미 오래 전에 조각나 절의 내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양양지방의 읍지 <현산지>에 보면 글자를 탁본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사람들의 피해가 컸다며 조선 영조 23년(1747년)의 일로 전한다. 그 피해를 피하기 위해 산골사람들이 탑신을 수십 수백 조각을 냈을지 모를 일이다. 다만 용의 얼굴을 한 귀부와 이수 부분만이 남아 있어 홍각선사를 따르던 많은 승려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선림원터를 지나 청룡폭포와 황룡폭포가 지키는 불바라기 약수에 이르는 삼십리 계곡을 사람들은 미천골이라 부른다. 삼십리 긴 계곡을 구분하던 벌막, 산죽밭, 진포무등골, 너래골 등의 이름은 한국전쟁 뒤 공비와 토벌꾼들의 총질을 피해 사람들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잊혀졌다. 50년대 말에 시작해 80년까지 20여년이 넘도록 계속됐던 산판 이야기는 이제 탁주 한잔을 따라야 들을 수 있는 옛 이야기다. 어느새 다시 숲을 채운 나무들은 원시림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계곡 곳곳에 남아있던 산판도로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젊어서 산판일을 했다는 이현재씨는 노래 한 자락을 청하자 그게 노래냐고, 무거운 나무를 드느라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내지르는 악이라며 이제 막 봄이 찾아드는 골짜기에 “에야디여… 어기여차…” 메아리를 날린다. 3살 때 나무장사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천골 사람이 된 김금녀(43)씨는 10∼20리 떨어진 산 속 밭을 돌며 농사를 짓고 등짐으로 수확물을 져내리던 옛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한다.
해방되던 해 80여호가 넘었다는 미천골사람들은 이제 산에서 살지 않는다. 김금녀씨와 그의 두 동생이 고인이 된 부친이 일군 토종벌통에 의지해 미천골의 옛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중생들이 겪는 그 고통의 윤회를 ‘나무관세음보살’만을 외워서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설파한 도의선사와 홍각선사의 사자후를 다시 듣고 싶다. 천년의 세월을 이긴 범종에 총질을 해대고 끝내 월정사와 함께 불태워 버리고, 산삼을 점지해준다는 불바라기 약수까지 산판길을 내느라 더럽힌 후대들에게 도의선사는 어떤 말을 건넬 것인가.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3-구룡령-도의선사-사자후를-듣고-싶다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지나온 백두대간 능선은 묵은 눈을 털어내며 봄 채비로 분주하다. 빈틈없이 어깨를 맞댄 저 봉우리 아래 그동안 만났던 백두대간 사람들은 또 어떤 모습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있을까? 남동쪽으로 이어진 만나야 할 산들은 구름에 몸을 감춘 채 대면식이나 치르자며 잠깐씩 얼굴을 내비친다. 저 구름나라 속에 오대산에서 불거져 나와 계방산을 낳고 태기산을 키우고 용문산을 어르며 달리다 한강의 물줄기를 막아선 팔당댐 두물머리에서 기운을 다하는 또 하나의 산줄기가 있을 것이다. 남한강과 북한강을 가르는 그 산줄기는 바다를 만나지 못하는 탓에 이름을 얻지 못했다.
용을 만나겠다는 생각은 구룡령 아래 첫마을 갈천에서 접어야 했다. “원래 고갯길은 지금 찻길이 아니래요. 마루에서 서쪽으로 산 하나는 넘어야 옛길이 있어요. 짚신 신고 다닐 때나 넘어 다녔지 지금은 길이 없을 거야.” 이두식(71) 할아버지는 고개의 내력을 일러주면서도 비탈밭 땅심을 돋울 퇴비를 지게에 퍼담기를 멈추지 않는다. ‘구렁이가 길을 알려줬다’는 전설이 전해지는 옛길이 사라진 것은 일제시대였다. 한계령이나 미시령보다도 먼저 놓인 구룡령 신작로는 땅 속은 헤집고 땅 위에서는 울창한 숲을 잡아먹었다. 두 세 아름씩이나 됐다는 빽빽한 소나무숲이 박살나고 산 여기저기 철광석을 캐는 굴이 뚫리기 시작한 것은 신작로가 난 다음이었다. 갈천4보 가운데 하나였던 지금의 구룡령 중간쯤에 있었다는 오관석이를 건드린 것도 신작로였다. “능선이 내려앉으면서 바위가 쑥 솟았는데 그 가운데로 길을 냈어요. 지금도 갈천 윗동네를 마치래라고 불러요. 땅이 말을 닮아서인데 그 바위가 말의 코였던 모양이라. 길을 낸 것이 마치 코뚜레를 뚫은 형국이었던 모양이지. 말에다 코뚜레를 뚫었으니 그 말이 어떻겠소. 날뛰지? 그래서 마을이 쇠퇴했대요.” 입심 좋은 미천골휴양림 관리인 이현재(61)씨의 설명은 확인할 길이 없다. 그나마 남아 있던 오관석이마저 95년 2차선으로 길을 넓히면서 아예 없애버린 탓이다. 이씨의 말이 맞는지 길이 나기 전 20여호에 이르던 마치래의 가구는 이제 4집이 남아 있을 뿐이다.
갈천(葛川)이라는 이름에는 지독한 가난이 함께 한다. “칡떡 먹어봤수? 칡을 물에 담가 두드리면 물이 하얘지는데 이 물을 가라앉히면 가루가 나오지. 그 가루로 떡을 해먹으며 보릿고개를 넘었다니까.” 봄이면 마을을 지나는 내가 칡물로 뽀얗다고 해서 ‘갈천’이 됐다는 것이다. “본래 이름은 치래지. 일본인들이 들어와 토지정리하면서 한자를 써서 갈천이라고 불리게 된 거요.” 몇 안 되는 갈천 토박이 엄익환(63)씨는 치래라는 이름의 내력을 풍수설로 설명한다. 피난처라고 들어왔는데 마을 형국이 강에 떠 있는 칡잎을 닮아서 사람들이 정주하지 못하고 이사를 간다는 것이 엄씨가 풀어내는 작은 내력이다. 엄씨의 설명에는 ‘치래’가 ‘칡물이 흐르는 내’가 아니라 ‘미래로 닿은 땅’ 치래(致來)라는 뜻이 담겨 있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양양은 변방지역이었다. 맥국의 부족국가에서 임둔군을 거쳐 다시 고구려로 신라로 고려로 수없이 뒤바뀌어온 역사의 소용돌이를 피해든 곳이 치래라면, 그 아랫마을 황이리 미천골 선림원에서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끝내려는 선종불교의 정신이 깃들어 있다. 누군가 근래에 세웠을 관세음보살이 보물 제444호로 지정된 3층 석탑을 바라보고 섰는 선림원터부도비는 홍각선사의 것이라 한다. 홍각선사의 법맥은 선종을 이 땅에 들여온 도의선사에 닿아 있는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신라 호족의 아들이었던 도의선사는 일찍이 당나라에 유학해 ‘동쪽의 달마’라는 칭송을 남겨두고 37년간의 타국살이를 끝내고 신라로 돌아온다. 헌덕왕 3년(821)의 일이다. 당시 신라불교의 주류는 교종이었다. 신라왕실의 전폭적인 지지와 보호를 받으며 경전 해석과 염불에 몰두하던 당시에 ‘염불을 외우고 경전을 해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본연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는 도의선사의 주장은 혁명이었을 것이다. ‘중생이 곧 부처’라는 도의선사의 사상에는 만인의 평등과 인간성 회복이 담겨 있었다. 이는 곧 신라왕권에 대한 도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다. 도의선사는 결국 다른 승려들의 배척을 받으며 선림원터에서 머지않은 양양군 둔전리에 진전사를 세우고 은둔하게 된다.
선림원터에서 발견된 범종의 명문에는 조성 시기를 애장왕 5년(804)이라고 적고 합천 해인사를 세운 순응화상까지도 범종조성불사에 참여한 것으로 적고 있다고 한다. 명문으로 본다면 선림원은 사세가 대단한 절이었을 것이다. 이런 절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어떤 연유였을까? 1985년 선림원지를 발굴한 동국대 조사단은 선림원이 산사태로 사라진 것으로 추측했다. 선림원지는 아무리 돌아봐도 산사태가 일어날 만한 지형이 아니었다. 산사태 흔적은 더구나 찾아볼 수 없었다. 왕명으로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해 비문을 새길 정도의 사찰이 아무런 이유없이 갑자기 사라진 데에는 다른 연유가 있었을 것이다.
“송도 말엽 불가사리가 돌아다닐 때 비구니들이 모여들어 절이 문란해지자 승려들이 절을 묻어버렸다”는 이야기는 도의선사의 법맥을 이은 가지산파의 운명과 연결된다. 가지산파는 고려와 운명을 함께 한 선종구산 가운데 일파였다. 1948년 발견된 범종은 엄청난 숯과 함께 흙 속에 묻혀 있었다고 한다. 숯은 부식으로부터 종을 보호하려는 수단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범종은 상처 하나 없는 온전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어떤 이유인지 알 길은 없지만 위기에 맞닥뜨린 승려들이 그 위기에서 범종을 구하기 위해 흙 속에 묻었던 것은 아닐까?
“8만 승려들이 중 훈련을 받던 곳”이라는 절의 규모에 대해서도 의문은 남는다. 선림원터에서 바라보이는 건너편 골짜기는 지금도 채마전이라 불린다. 승려들이 먹을 채소를 재배한 밭터였다는 것이다. 깊은 산중에 어울리지 않는 미천골 상류 밤나무골의 고목이 된 밤나무들에는 부처님 공양에 쓸 밤을 얻기 위해 절에서 심은 것이라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쌀 씻은 물이 양양 남대천까지 물을 흐렸다는 미천골은 옛 이름 사래골도 ‘쌀내’가 변한 것이라 한다. 선림원터에 남아 있는 건물터라곤 부처님을 모셨던 금당의 주춧돌뿐이다. 그 많던 승려들은 어디에 머물렀던 것일까? 미천골 어딘가에 또다른 흔적이 남아 있을지 모를 일이다.
왕희지의 글자를 집자했다는 홍각선사부도비 탑신은 이미 오래 전에 조각나 절의 내력을 제대로 전하지 못한다. 양양지방의 읍지 <현산지>에 보면 글자를 탁본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마을사람들의 피해가 컸다며 조선 영조 23년(1747년)의 일로 전한다. 그 피해를 피하기 위해 산골사람들이 탑신을 수십 수백 조각을 냈을지 모를 일이다. 다만 용의 얼굴을 한 귀부와 이수 부분만이 남아 있어 홍각선사를 따르던 많은 승려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다.
선림원터를 지나 청룡폭포와 황룡폭포가 지키는 불바라기 약수에 이르는 삼십리 계곡을 사람들은 미천골이라 부른다. 삼십리 긴 계곡을 구분하던 벌막, 산죽밭, 진포무등골, 너래골 등의 이름은 한국전쟁 뒤 공비와 토벌꾼들의 총질을 피해 사람들이 산을 내려가기 시작하면서 잊혀졌다. 50년대 말에 시작해 80년까지 20여년이 넘도록 계속됐던 산판 이야기는 이제 탁주 한잔을 따라야 들을 수 있는 옛 이야기다. 어느새 다시 숲을 채운 나무들은 원시림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계곡 곳곳에 남아있던 산판도로의 흔적을 지우고 있다.
젊어서 산판일을 했다는 이현재씨는 노래 한 자락을 청하자 그게 노래냐고, 무거운 나무를 드느라 뼈가 어긋나는 고통을 참기 위해 내지르는 악이라며 이제 막 봄이 찾아드는 골짜기에 “에야디여… 어기여차…” 메아리를 날린다. 3살 때 나무장사하던 아버지를 따라 미천골 사람이 된 김금녀(43)씨는 10∼20리 떨어진 산 속 밭을 돌며 농사를 짓고 등짐으로 수확물을 져내리던 옛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고통스러워한다.
해방되던 해 80여호가 넘었다는 미천골사람들은 이제 산에서 살지 않는다. 김금녀씨와 그의 두 동생이 고인이 된 부친이 일군 토종벌통에 의지해 미천골의 옛 이야기를 전할 뿐이다. 중생들이 겪는 그 고통의 윤회를 ‘나무관세음보살’만을 외워서는 끊을 수 없다는 것을 설파한 도의선사와 홍각선사의 사자후를 다시 듣고 싶다. 천년의 세월을 이긴 범종에 총질을 해대고 끝내 월정사와 함께 불태워 버리고, 산삼을 점지해준다는 불바라기 약수까지 산판길을 내느라 더럽힌 후대들에게 도의선사는 어떤 말을 건넬 것인가.
출처: http://100mt.tistory.com/entry/백두대간사람들-13-구룡령-도의선사-사자후를-듣고-싶다 [<한겨레21> 신 백두대간 기행 블로그]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